원효성사년보 元曉聖師年譜
1세 (617년, 진평왕 39년)
장산현章山懸(현 경상북도 경산) 율곡栗谷(밤실)에서 태어남. 조부는 잉피공仍皮公이었고, 아버지는 내말 乃末(신라관등으로 17위 중 11위)담날談捺 이었다.
16세 전후 (632년, 선덕여왕 1년)
출가하여 스님이 됨.
34세 (650년, 진덕여왕 1년)
30세 초반에 낭지郎智 대사에게 나아가 배움,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지음. 34세 되는 해에 의상대사와 중국에 가서 불법을 공부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요동遼東에서 억류되었다가 돌아옴, 30대 후반에 고구려 스승으로 백제 땅인 완주完州(현 전주지방) 고대산(孤大山,高達山이라고도 함)으로 옮겨가 지낸다는 보덕普德 화상을 의상스님과 함께 찾아가 「열반경涅般經」과 「유마경維摩經」
을 배움.
45세 (661년, 문무왕 1년)
의상스님과 함께 다시 중국에 가려고 가던 중, 당항성當項城(지금의 인천지역) 부근에서 원효스님은 돌아오고 의상스님만 중국에 감. 이때 널리 알려진 토감우숙土龕寓宿의 일을 겪음. 40대 후반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에게 쟁관법錚觀法을 만들어 지도함.
52세 (668년, 문무왕 8년)
50대 초반으로 요석궁에 홀로 살던 과공주寡公主와 결연結緣하여 설총을 나음. 이때 일명 천주요를 불러 인연을 맺게 됨. 이후 파계하였다고 하여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일컬음. 당해 52세에 김유신에게 소정방이 보낸 난독도의 뜻을 풀이해 줌.
55세 (671년, 문무왕 11년)
행명사行名寺에서 「판비량론判比量論」을 지음. 50세 후반 고선사高仙寺에 있으면서 사복蛇福의 모친 장례를 치룸.
60대 초반
많은 경소經疏를 찬술하면서 항사사恒沙寺(현 영일 오어사吾魚寺)에 있는 혜공惠空대사에게 가서 질의 함.
60대 중반
대안大安대사와 교분을 가짐. 「금강삼매경소 金剛三昧經疏」를 지음, 각승角乘의 이야기가 있게 됨. 시기하는 이들의 방해로 완성한 경소를 잃어버리고 다시 「금강삼매경소」 3권을 쓰고 설법함.
60대 후반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지음, 분황사에서 「화엄경 제40 회향품소廻向品疏」까지 짓고 절필함.
70세 (686년, 신문왕 6년)
3월 30일(음) 혈사穴寺에서 입적入寂, 설총이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고 배례拜禮하니 소상이 그 고개를 돌려 설총을 바라봄.
또한 원효성사께서는 입적 후 신라 십성十聖중 한 분으로 흥륜사興輪寺 금당에 모셔졌으며, 사후110년경(애장왕 대)에 「고선사서당화상탑비高仙寺誓幢和尙塔碑」가 건립되었으며, 사후 415년(고려 숙종 6년)에 화쟁국사和諍國師 의 시호를 내렸다. 사후 500년 전후 (고려 명종 대)에 분황사에 화쟁국사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