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사 원효성사 탄생지와 유허비 元曉聖師誕生地遺墟碑
반만년 대한민국의 역사속에 조국과 민족을 빛내기 위해
전력을 투구했던 민족주의자 및 영웅과 호걸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수 많은 인걸 중에 불가의 원효가 단연 으뜸임을 경북 경산시 자인면 북사리 도찬산 기슭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석사의 원효성사 탄생 유허비를 통하여 명명 백백하게 밝히는 바이다.
원효는 일찍이 신라 진평왕대인 서기 617년 탄생하시어 신문왕대인 686년에 원적하시니 세수가 70세였다.
왕족인 잉피공의 손자이며 담날의 아들로 탄생지는 불지촌 인바 오늘 이 유허비가 세워진 율곡이다. 원효의 생가는 본래 율곡 남쪽에 있었다고 전하는 바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하고 10개월 후 이 율곡골짜기를 지나다가 산기가 있어 귀가할 틈도 없이 밤나무 밑에서 출산하니 이를 지켜본 밤나무를 사라수라 하였다는 삼국유사의 '원효불기조' 에 기록이 전해진다.
원효의 속성은 설씨로서 어린시절 아명을 서당, 또는 신당 이라 하였으며 소년시절 화랑의 무리에 속하였다가 도중에 깨달은 바가 있어 출가를 결심,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초개사라는 절을 창건한 후 원효라는 법명을 썼다.
서기 648년에 황룡사에서 스님이 되어 각종 불전을 섭렵하였고, 일체의 사물을 궁구하여 내외전에 능통하였다. 타고난 인품이 본래 총명하여 불교와 유교의 전적을 두루 섭렵함에 한국불교사의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추앙을 받는 사상가로서 민족지도자이다.
깨달음을 구하고자 의상과 당나라 유학의 길에 올랐다가 옛무덤에서 밤을 지새며 잠결에 마신 물이 인골에 담긴 물이었음을 뒤늦게 알고 “사물 자체에는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고 오로지 마음에 달렸음”을 크게 깨닫고 오도송을 남기니 불후의 명구가 되었다.
원효는 「심생고종종법생(心生故種種法生)이요 심멸고감분불이(心滅故龕墳不二)구나,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萬法唯識)이며, 심외무법호용별구(心外無法胡用別求)하리요」라는 사자후를 토함에 신라인으로서의 사상적 보편성과 학문성을 드높이게 되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국경을 넘어 일본, 중국, 인도 등 세계화되어 「불출호 지천하(不出戶 知天下)」란 노자의 말처럼 “문 밖을 나가지 않고도 능히 세계를 알았다.” 원효성사는 학문적 높이와 사상적 깊이를 통해 요석공주로 하여금 이두의 창시자인 설총을 탄생케 하니 신라국민의 교육과 이상에 횃불이 되었다.
무애행으로서 불교의 대중화와 찬불가 보급 및 불교무용의 효시를 이루었고 금강삼매론 등 1백 여부에 240여 권의 저술을 남겼으며 일심·화쟁·무애 등 삼대사상으로 한국불교의 우수성을 역사와 민족 앞에 우뚝 세웠다.